대조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 비판적 미술운동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우리 나라의 기존 화단에서는 민중미술을 예술성이 결여된 정치적 선전이라고 공격하는 등 화단이 양분되다시피 한 격론과 반론을 겪어야 했으며 이러한 과정은 다양한 시각 모색의 시련과 반성을 향한 자극이 되었다.
운동>,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미술> 등에서 참조.
세 거장이 남긴 벽화 작품만 해도 셀 수 없지 많지만 그 중 각자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냈다고 생각되는 대표작을 간단하게 언급함으로서 벽화 운동의 흐름과 성격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차핑고 성
민중미술 양자에 편재하는 이념적,양식적 획일성을 거부, 그에 대한 제 3의 대안 또는 비판적 대응으로써 비조각적 오브제와 설치라는 새로운 미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탈 모던을 명시적으로 천명하고 나온 80년대 중후반의 한국의 소그룹 운동은 다원주의를 폭넓게 확산시키며 90년대 한
운동 (‘문화운동 시론 III')
3. 문화패와 민중문화운동 (정이담)
(1) 문화패 - 70년대부터 문화적 활동의 주체였던 대학의 문화․예술 써클로
탈춤, 연극, 노래, 민요, 미술, 문학, 풍물, 춤 등의 영역에서 활동
(2) 민중문화
- 민중의 삶에서 분리된 문화는 죽은 문화로 민중문화운
미술공예운동은 이념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으나 수공예로 제작된 제품은 기계제 생산에 비하여 많은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일품으로 생산되고 소량이기 때문에 매우
비쌌다. 결국 자급자족 단계의 민중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상류층을 위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대중들의 생
예술적 표현 방식을 찾고자 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형식적 예술 실천의 이상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결정에 맡겨 어떤 변화에도 무관심 할 수 있었다. 이태호·김태중,「5월의 기억과 미술」,『기억투쟁과 문화운동의 전개』, 역사비평사, 2004, 414쪽.
5월 미술운동의 경우는 군사문화 주체 세력
운동은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인 1920년대에 일어났다. 이 혼란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정부 주도하에 사회 개혁과 민중 계몽을 목적으로 벌어졌던 미술운동인 것이다. 많은 벽화가들은 이전 식민지 시대와 그에 이어진 독립 후 혼란기 동안의 예술과 같이 예술을 위한 예술을 제작했던 것이 아니라, 사
Ⅰ. 서론
광주항쟁을 승리한 항쟁으로 규정하여 그 과정과 요인을 설명했지만, 한 가지 지적할 일은 이 승리가 완전한 승리라기보다는 ‘제한된 승리’라는 사실이다. 그 근거는 두 가지 차원에서 확인된다. 첫째는 적극적 미래지향적 전망에서 볼 때, 봉기시의 자치공동체에서 실현되었고 5월 운동
예술경향을 낳게 된다. 이러한 격변하는 사회적 문화적 흐름 속에서 국내 화단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을까? 해방이후 국내 화단은 크게 두 가지의 흐름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일제 시대의 선전에서부터 계속되어온 심미주의적 경향의 미술과 앙포르멜, 국제주의 그리고 현대주의를 지향하는 형식
3.. 80년대를 지배했던 문화운동민중문화운동
80년대의 문화운동에서 문화는 인간의 삶의 양식의 총합이라기 보다는 미술, 음악, 문학과 같은 ‘예술적 표현양식과 활동’을 정치, 사회, 경제 등의 정치적 기반과 연결하여 이해되었다. 80년대의 한국문화는 서구자본주의 문화가 주축이 되어 문